칼럼 147

일본시민들의 '작은 나라론'

“일본이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그리 부끄러운 일인가요.” 지난 16일 도쿄시내 요요기 공원. 폭염에도 불구하고 17만명이 운집한 ‘사요나라 원전’ 집회에서 연사들의 말을 반쯤 흘려듣던 도중 여류 논픽션작가 사와치 히사에(澤地久枝)의 말이 귀에 생생하게 꽂혔다. 사와치는 81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작은 국토에 걸맞는, (대신) 일본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작은 나라’는 매우 함축적인 말이다. 최근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본질을 짚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불황에 저출산·고령화로 경제활력이 줄어들면서 일본은 세계 2위이던 국내총생산(GDP)을 2010년 중국에 추월당한 데 이어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근원적인 선택에 직..

칼럼 2012.07.19

노다의 증세, 방법이 틀렸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해온 소비세 인상법안이 지난 26일 일본 중의원을 통과하자 한국에서는 노다 총리의 리더십을 칭송하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일본이 ‘제자리 걸음 정치’에서 탈피해 결정하는 정치를 오랫만에 보여줬다거나, 정권유지보다 국가의 미래를 더 우선시하는 결단을 내렸다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현지에서 소비세 증세과정을 죽 지켜본 기자로서는 이런 칭찬 일변도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증세의 방법이 잘못됐다. 노다 정권은 증세로 가장 손쉬운 소비세를 택했다. 소비세란 한국의 부가가치세에 해당한다. 상품에 붙는 세금을 올리는 것인 만큼 조세저항이 적고, 징수도 쉽다. 소비세는 영세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이 세금인상의 직접 피해를 보는 소득역진적 세금이다. 대기업..

칼럼 2012.06.28

우리에겐 여백이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를 처음 봤을 때 한방 먹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는 선과 악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이토록 선명하게 그린 작품을 그전까지 접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대표하는 ‘원령공주’와 인간의 편인 ‘에보시’라는 두 여성은 치명적으로 대립하지만 어느 한쪽을 편들기 어려운 미덕을 갖고 있다. 주인공 아시타카가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장면도 이분법의 도식을 넘어선다. 이런 세계관은 미야자키 감독뿐 아니라 다른 일본 작품들에서도 간혹 등장한다.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 적을 벤 뒤 그 시신 앞에서 간단히 예를 올리는 장면이 심심찮게 보인다.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다신(多神)주의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켜야 ..

칼럼 2012.06.07

진보의 갈라파고스화

일본 나가노(長野)현 기타사쿠(北佐久)군에 아사마(淺間)라는 이름의 산장이 있다. 일본 수도권의 휴양지인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멀지 않은 이 산장에서 40년 전 벌어진 열흘간의 농성사건은 일본의 혁신운동의 운명을 바꿔놨다. 1972년 2월19일 혁신운동 조직의 한 분파인 렌고세키군(連合赤軍) 조직원 5명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장에 잠입했다. 이들은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은 채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경찰 2명과 민간인 1명이 죽고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은 이 사건의 마지막 날인 2월28일에는 경찰이 중장비를 동원해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 진압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돼 89.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열흘간의 총격전보다 일본 국민을 더 전율케 한 것은 ‘내부공산주의화의 순화’라는 명목 아..

칼럼 2012.05.17

더 작아진 일본 외교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야 워낙 유명한 극우 포퓰리스트여서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이는 일본 안에서도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그가 최근 미국 워싱턴 강연회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빚어온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도쿄시민이 낸 세금으로 사들이겠다”며 오랜만에 ‘한방’ 날렸다. 일본 민주당 정부에 트라우마가 있는 센카쿠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이 “그렇다면 정부가 매입하겠다”며 뒷수습에 나섰다. 외교 파장도 커져 아들인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信晃) 자민당 간사장은 중국 방문을 취소했다. 그가 방중 때 강연하기로 한 상하이대학이 “부친의 발언 파문으로 강연이 어렵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나..

칼럼 2012.04.26

더 작아진 일본외교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야 워낙 유명한 극우 포퓰리스트여서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이는 일본 안에서도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그가 최근 미국 워싱턴 강연회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빚어온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도쿄시민이 낸 세금으로 사들이겠다”며 오랜만에 ‘한방’ 날렸다. 일본 민주당 정부에 트라우마가 있는 센카쿠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이 “그렇다면 정부가 매입하겠다”며 뒷수습에 나섰다. 외교 파장도 커져 아들인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信晃) 자민당 간사장은 중국 방문을 취소했다. 그가 방중 때 강연하기로 한 상하이대학이 “부친의 발언 파문으로 강연이 어렵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나..

칼럼 2012.04.26

일본 청년들이 불행한 이유

올해 93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요즘도 언론에 등장해 정국 현안에 대해 왕성하게 발언한다. 신문기자를 거쳐 30여년간 정치평론가로 일해온 82세의 미야케 히사유키(三宅久之)는 올해 들어서야 TV토론 프로그램에서 은퇴했다. 79세의 극우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도중에 그만두지 않는 한 81세까지 지사직을 수행하게 된다. 도쿄 도심 오피스가로 향하는 아침 전철에서는 정장을 빼입은 세련된 노신사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다. 정년이 65세까지 늘어난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들르는 동네 편의점에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 점장이 건강한 목소리로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를 외치며 분위기를 돋운다. 기업에선 후배에게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넘겨준 뒤 회장으로..

칼럼 2012.04.05

원전 차라리 서울에 지으라

“후쿠시마에 간다면 피폭은 각오해야 합니다.” 지난 4일 신칸센 열차 구내방송이 후쿠시마(福島)시 도착을 알리자 며칠 전 만난 원자력공학자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역을 나온 뒤 슈퍼에 들러 튼튼해 보이는 마스크를 사 얼른 썼다. 후쿠시마에서 하루 반을 머물러야 하는 취재 일정이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1년 전부터 유출되기 시작한 방사성물질은 바람을 타고 퍼지며 곳곳에 핫스팟(hot spot·주변에 비해 유독 방사선량이 높은 지점)을 만들었다. 원전 서북 방향에 나란히 위치한 이다테무라(飯館村)와 후쿠시마시는 후쿠시마현 중에서도 핫스팟에 속한다. 이다테무라에서는 대낮인데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일본의 사회인프라로 불리는 편의점조차 문을 닫았다. 달리는 차안에..

칼럼 2012.03.15

일본정치의 '료마 마케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다. 에도(江戶)시대 말기 하급무사였던 료마는 영지를 떠나 지사(志士)로 활동하면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성립에 기여했다. 교토(京都)에서 자객의 칼에 맞아 요절한 료마는 한동안 잊혀졌다가 고향 고치(高知)현의 한 신문이 10여년 뒤 그의 평전을 연재하면서 알려졌다. 러일전쟁 직전엔 메이지 왕후의 꿈속에 료마가 나타나 “제가 해군들을 수호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국에 회자됐고,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이후 료마는 영웅으로 추앙됐다. 이후 최근까지 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만 20편이 제작됐고, 2010년 NHK가 방영한 까지 TV 드라마도 8차례 만들어졌다. 최근 일본..

칼럼 2012.02.16

한류의 원조는 정치다

지난해 부임해 만난 일본인들은 대개 ‘케이포푸’(K-POP의 일본식 발음)와 한국 드라마,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의 코리안타운을 화제로 올리며 한국에 호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가끔은 이렇게 한마디 덧붙이는 이들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도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넘어가선 안되겠다 싶어 “그건 오해고, 사실은 이렇다”고 설명하면서도 외국인에게 내 나라 정부의 문제점을 언급해야 하는 개운치 않은 경험이 몇번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명박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한·일관계를 ‘소리나지 않도록’ 관리해온 점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일 태도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고, 이 점이 일본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무..

칼럼 2012.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