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47

기자메모/대지진 이후 3년간의 일본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 발생 직후 일본에서는 ‘전후(戰後)’를 폐기하고 ‘재후(災後)’체제를 열어야 한다는 담론이 한때 주목받았다. 동일본대지진은 복원이나 부흥이 아닌 ‘국토창조’를 염두에 둬야할 정도의 사태여서 이를 감당하려면 ‘전후정치’라는 틀을 벗어나야 한다(정치학자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는 논리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고도성장을 구가해 오다가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로 한계에 봉착하면서 전후질서 청산을 모색해왔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일본대지진의 충격이 전후질서를 ‘강제종료’하는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해왔던 것이다. 일본의 전후체제는 성장경제와 평화주의라는 두 개의 바퀴에 의해 굴러갔다. 이 가운데 성장경제를 뒷받침해온 핵발전이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칼럼 2014.03.06

'대학생 도쿄원정대' 인상기

‘2·8 조선청년 독립선언 95주년 맞이 대학생 도쿄원정대’가 지난주 일본을 다녀갔다. 2박3일 동안 내각부 항의 방문, 2·8독립선언 재연 등 일정을 소화하면서 학생들은 보고 느낀 것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을 지켜보면서 ‘반일운동’ 방식이 업그레이드돼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주요 목적인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반대 퍼포먼스는 끝내 무산됐다. 학생들이 일본 방문 전에 기자회견을 열어 야스쿠니에서 퍼포먼스를 벌인다고 하는 소식에 재특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특별소집 공고를 내렸다. 지난 7일 오후 야스쿠니신사를 둘러보니 곳곳에 우익단체 회원들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었다. 일본 경찰로서는 충돌 방지를 위해 대학생들의 야스쿠니행을 막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 경찰이 과잉통제한..

칼럼 2014.02.13

다시 칼을 빼든 고이즈미

72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원전제로’를 내걸고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의 도쿄도지사 출마를 지원하고 나섰을 때 많은 이들은 고이즈미가 야권재편 같은 정치적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것 아니냐고 관측했다. 사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이즈미의 지난해부터의 행적을 살펴본다면 ‘정치적’이란 단어만으로는 그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라스트 보스’라며 그를 추앙해온 자민당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고이즈미가 ‘탈핵’을 들고 나온 과정은 음미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고이즈미는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이후 꽤 오랜 기간 일본의 에너지 문제를 고민해왔던 것 같다. 지난해 8월 세계 유일의 핵폐기물 처분장인 핀란드의 ‘온카로’를 방문해서는 지하 400m..

칼럼 2014.01.23

친근한 아베씨

신년 첫날 산케이신문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연두 대담 기사가 2개면에 걸쳐 실렸다. 상대는 일본의 ‘국민 아이돌 그룹’ AKB48의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秋元康). 한국으로 치면 소녀시대를 기획한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쯤 되는 인물이다. 대담은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매력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대중문화 콘텐츠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로 시작해 아베 집권 1년의 치적을 은근히 자찬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집권 2년차를 맞은 일국의 정상이 연두부터 대중문화계 인사와 무릎을 맞댄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지난달 30일 민영방송인 니혼TV의 오락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내민 아베는 부인인 아키에(昭惠)여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가정의 행복은 아내에게 항복하는 것”(행복..

칼럼 2014.01.02

동북아의 새로운 섬, 한국

그다지 좋아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기준으로 요즘 한국사회를 본다면 참담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15위인 나라에서 국가정보기관이 대통령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사태의 심각성으로 따지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미국의 ‘워터게이트’를 능가하지만 1년이 돼가도록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보장을 희생해가며 막대한 국방비를 쏟아부었음에도 군은 작전권을 미국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우려에도 아랑곳없이 정부는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들었고, 초일류기업 삼성은 아직도 노조를 적으로 몰고 있다. “툭 하면 파업할 것”이라며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한 여당 의원의 사고방식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다고 할 ..

칼럼 2013.12.12

도쿄 코리안타운에 등장한 NK팝

지난 10월 중순 ‘코리안타운’으로 불리는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의 한 공연장에서 ‘K팝 대 NK팝’ 대결이라는 이벤트가 벌어졌다. K팝은 물론 한국음악이지만, NK팝은? 놀랍게도 북한(North Korea)음악이다. 60여명 남짓 모인 행사는 ‘북한판 소녀시대’로 불리는 모란봉악단과 한국가요를 비교하며 한류전문가와 북한음악 매니아가 해설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주최 측은 대결 결과 NK팝의 승리를 선포했다. 행사 자체도 경악할 일인데다 ‘한류의 성지’인 신오쿠보에서 벌어진 것도 충격이다. 일본 내 극소수 ‘사회주의 매니아’나 ‘북한 오타쿠’들의 이색 취미라고 넘어가기엔 찜찜하다. 일본사회의 NK팝에 대한 관심은 지난해 등장한 모란봉악단이 기폭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모란봉악단은 K팝 걸그룹을 방..

칼럼 2013.11.21

(주)도쿄전력이라는 괴물

일본인들은 자국을 위협하는 집단으로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에서 충돌을 빚고 있는 중국이나 핵·미사일을 개발하는 북한을 들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쿄전력, 정확히는 ‘주식회사 체제인 도쿄전력’을 더 현실적인 위협요인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일본의 원자력발전은 ‘국책민영(國策民營)’ 구조로 운영돼 왔다. 정부가 중장기적인 원전정책을 세우면 민간기업이 원전을 짓고 돌리는 식이다. 정부는 전력회사의 지역독점 체제를 보장하고 공사비는 전기요금으로 벌충하도록 지원해왔다. 발전비용에 일정한 이윤을 곱하는 총괄원가방식으로 전기요금이 산정되는 만큼 전력회사 입장에서는 원전을 지으면 지을수록 유리하다. 또 하나 특징은 원전사고가 날 경우 전력회사가 배상할 수 있는 한도액이 고작 1200억엔(약 1조3000억원)으..

칼럼 2013.10.31

일본의 속살 보여준 드라마 '아마짱'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아베노믹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MB노믹스’와 닮은 꼴이다. 고환율(엔저)을 유도해 수출 대기업을 지원하고 건설투자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방식은 다를게 없고, 그 부작용으로 서민들의 생계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흐름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아베가 가리키는 방향 혹은 MB시대의 한국과 비슷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지난달 막을 내린 NHK 아침드라마 은 일본의 ‘속살’이 한국 사회와 다르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도쿄의 여고생인 아키는 여름방학에 어머니의 고향인 도호쿠(東北) 이와테(岩手)현의 작은 어촌마을에 잠시 놀러 왔다가 아예 눌러앉게 된다. 도쿄의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받으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아키는 인심 넉넉한 어..

칼럼 2013.10.10

'사고수습의 민영화'가 오염수 재앙을 키웠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방사능 오염수가 불어나는 사태와 관련해 원자력 전문가들은 사고 초기부터 원전 건물 둘레에 차수벽을 설치해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가 고여 있는 원전 건물에 지하수가 유입돼 섞이는 것을 방지하라고 지적해왔다. 하지만 사고 초기 언론에 잠시 언급된 이후 차수벽 문제는 유야무야됐다. 오염수 사태가 심각한 재앙으로 번진 최근에서야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막대한 공사비로 주주들의 비판을 살 것을 우려한 도쿄전력이 차수벽 설치를 계획적으로 유야무야시킨 것이다. 마부치 스미오(馬淵澄夫) 민주당 중의원은 원전사고 2주 뒤인 2011년 3월26일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의 원전사고담당 보좌관에 취임한 직후부터 오염수 대책에 착수해 두 달 뒤 차수벽 설치계획을 마련했다. 마..

칼럼 2013.09.23

[특파원칼럼] 일본에 ‘햇볕정책’을

박근혜 외교가 처음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일본이 하반기 중 정상회담을 열 것을 제안해 왔고, 그에 답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성대로라면 거부하는 편이 손쉽고 명분도 있다. 당장, 8·15 추도사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아시아 각국에 대한 ‘가해와 반성’을 빼먹은 일을 들어 ‘올바른 역사인식을 그렇게 강조했건만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하면 그걸로 족하다. 정부는 9월 초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 중 회담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을 비쳤다. 하지만 어렵고 험한 상대와도 만나 대화를 통해 타협을 도출하는 것이 외교라고 한다면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바람직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정권은 앞으로 별일이 없다면 향후 3년은 지속된다. ..

칼럼 201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