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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가방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유쾌한 데몬스트레이션

의 주연 김인권을 에서 처음 봤다. 공부도 그렇고 배경도 변변치 않은 1년 꿇은 복학생 역으로 나왔는데 수업중에 장군의 아들(유신시대에서 장군의 아들을 건드리다니 약먹었다)인 동급생의 뒤통수를 볼펜으로 찍는 장면은 정말 리얼했다. 이후 별로 영화볼 기회가 없었지만 이 '볼펜 마빡 찍기' 신은 워낙 강렬해서 잘 잊혀지지 않는다. 김인권은 청년실업자가 외국인노동자로 위장취업하면서 겪는 소동을 그린 에서도 기대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줬다. 웰메이드라고 하기엔 2% 부족한 영화지만 그의 연기는 군더더기 없이 리얼했다. 무거운 주제인데도 어깨에 힘을 빼고 만들었다는 점은 점수를 줄 만 하다. 외국인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든다면 코미디 영화가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거슬리는 장면들도 꽤 있고..

읽은거 본거 2010.10.22

애플이 될 수도 있었던 소리바다의 수난사

‘랜선’으로 불리는 광통신망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날. 사무실 동료를 통해 ‘소리바다’라는 사이트를 알게 됐다. 자신이 보유한 파일을 인터넷을 통해 주고받는 P2P방식의 이 서비스에 흠뻑 빠져 며칠동안 밤낮으로 음악을 다운받던 기억이 새롭다. 2000년 5월 등장한 소리바다는 4개월 만에 가입자가 75만명, 이듬해에는 600만명, 3년만에 2000만명을 기록했다. 음반이 절판돼 유통되지 않는 음악, 제3세계 음악 등 기존의 유통망에선 구할 수 없는 음악을 소리바다를 통해 공유하게 되자 네티즌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소리바다는 그저 평범한 인터넷 음악서비스의 하나일 뿐이다. 지난 10년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실문화)는 이 과정을 추적한다. P2P서비스는..

읽은거 본거 2010.10.14

친서민-민영화된 포퓰리즘

 내년 예산안이 제출되면서 이명박 정부가 입에 달고 사는 ‘친서민’의 배경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생겼다. 출발점은 공교롭게도 감세정책이다. 정부는 출범 첫해 대규모 감세정책을 내놓았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낮추고, 종합부동산세의 징수 범위를 확 줄였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자 재정지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정부가 계획 중인 감세 규모는 임기 5년 동안 60조원이 넘는다. 여기에 4대강 예산으로 매년 5조원가량이 빠져나간다. 살림살이가 나빠지면서 서민·복지예산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자 이명박 정부는 ‘서민정책의 아웃소싱’을 시도한다. 금융권과 일부 대기업들의 팔목을 비틀어 재원을 조달한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1호 상품이 미소금융이고, 2호가 ‘햇살론’이다. 금융권 안팎에선 대출 부실 우려가..

칼럼 2010.10.07

일본을 바꾼 무표정의 행동주의자

고용난민과 관련해 일본출장을 준비하면서 반빈곤네트워크 사무국장겸 내각부 참여(어드바이저)인 유아사 마코토도 취재대상에 넣었지만 기대하지 못했다. 워낙 늦게 연락을 했고 국내 전문가들도 "너무 바쁜 사람이라 어떨지 모르겠다"며 반신반의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냈는데 뜻밖에도 답신이 왔다. "8월12일 가스미가세키의 내각부 사무실에서 만납시다" 유아사 마코토의 이력은 국내에도 소개돼 있긴 하지만 대체로 이렇다. 도쿄대를 다니던 시절부터 노숙자 지원활동 등을 벌여오다 박사과정을 중도에 그만두고 아예 반빈곤운동에 투신했다. 반빈곤네트워크 사무국장과 빈곤층 생활지원센터 모야이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서의동 그는 일본의 젊은 세대에서는 보기 드문 행동주의자이다. 그의 책 (국내에..

사람들 2010.09.26

요즘 경제와 책들

※기획회의 280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년이 지난 지금 세계경제는 외견상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 2009년 초 동유럽 재정불안, 하반기 두바이의 신용경색, 올해 초의 남유럽 재정위기 등 간헐적인 여진(餘震)들이 있었지만 세계 각국의 대규모 경기부양 조치에 힘입어 경제는 ‘불안한 회복’ 단계에 놓여있다.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2008년 9월15일)을 계기로 금융위기가 본격화할 당시엔 1930년대 대공황의 재판이 되리라는 예측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황 이후 세계가 블록경제로 분열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몰고온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각국이 긴밀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경기부양에 나서면서 ‘급한 불’은 꺼진 셈이다. 2년이 지난 지금 ..

읽은거 본거 2010.09.23

'로리타 패션'을 한 사회운동가

ⓒ서의동 아마미야 카린을 만난 것은 지난달 9일이다. 출장전 메일을 주고받았고, 그가 쓴 책들을 조금 살펴보면서 괴짜가 아닐까 생각했다. 만나자고 한 장소도 도쿄의 매우 비싼 호텔 아서원(일본말로는 가죠엔)이어서 약간 당황했다. 메구로에 있는 가죠엔은 정말 호화스런 호텔이었다. 좀 사는 상류층의 자제들이 결혼하는 장소라고 들었는데 비싼 기모노와 혼수품 판매장도 있고, 심지어 1층 화장실에는 잉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1층 라운지에서의 차값은 아이스커피가 845엔으로 우리돈을 1만2000원 쯤 될라나.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나중에 왜 여기서 하자고 했느냐 물었더니 집이 가까워서라고 한다) ⓒ서의동 아마미야 카린(35). 일본 작가겸 사회운동가로 당사자운동의 기수로 꼽히는 여성이다. 그의 복장은 요..

사람들 2010.09.17

금융위기 2년 일본은 지금

ⓒ서의동 지난 2일 오후 도쿄시내 JR 다마치 역. 평소 2~3분이면 오던 열차가 10분 넘게 지연됐다. 잠시후 “인명사고 때문에 열차가 늦어지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인명사고란 자살사고를 의미한다. 열차를 기다리던 시마다 아사코(62·여)는 “JR 노선 중에서 특히 외곽을 잇는 노선에서 인명사고가 많다”며 “금융위기 이후 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 시내 중심가의 지하통로에는 70대로 보이는 노숙인이 섭씨 30도가 넘는 온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통로바닥에 누워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도쿄 인근 사이타마의 빈곤지원단체인 호토포토의 후지타 다카노리 대표이사(28)는 “금융위기 이후 네트카페(PC방) 숙식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상담건수는 20..

신문에 쓴 글 2010.09.17

도쿄의 우울 - 2010년 8월

8월9일 도착한 도쿄는 잔뜩 흐려 있었다. 하네다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하마마츠초로 이어지는 이 곳은 도쿄의 대표적인 공장지대. 먹구름과 살풍경한 공장지대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하마마츠초 부근의 한 역사. 철도왕국답게 복복복선 쯤 되는 철도레일들이 도심을 통과하고 있다. 배낭이나 여행가방을 잔뜩 짊어진 여행객들에게 도쿄여행은 아주 괴롭다. 역마다 꽤많은 락카가 있지만 여름 휴가철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없다. 이날 밤 시즈오카 행 신간선 표를 끊어놓고, 락카를 찾았지만 도쿄역 구내락카는 빈자리가 없었다. JR로 한정거장 떨어진 유라쿠초까지 갔지만 없었다. 유라쿠초 빅카메라 지하와 지하철간 통로에 있는 락카를 간신히 발견해 이곳에 여행가방을 꾸겨넣었다. 락카 찾는데만 1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고용난민..

여행의 맛 2010.09.13

[서평] 社史도 모범인 안철수연구소

이 책은 사사(社史)다. 사사는 회사의 허물은 감추고 장점은 부각시키는 경우가 흔하다. 안철수연구소 사람들이 지은 (김영사)라고 해서 허물을 100% 가감 없이 내보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의 서평을 쓰기로 한 것은 안철수연구소의 이름값 때문이다. 이 책은 창업자인 안철수가 1988년 의대 박사과정 시절 컴퓨터 모니터에서 ‘브레인’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보통 책자의 3분의 2쯤 되는 플로피 디스켓이 통용되던 시절부터 안철수는 바이러스와 씨름해 왔다. 박사과정과 군복무를 하는 동안 7년간 잠을 쪼개가며 백신 개발에 매달려온 안철수는 진로를 결정할 시점에서 망설임 없이 의대 교수직을 버리고, 백신 프로그램 개발자로의 험난한 여정에 뛰어든다. 이 책은 후반부로 ..

읽은거 본거 2010.09.13

어떤 취업기-1986년과 2010년

# 대학 2학년 겨울방학이던 1986년 1월 경기 부천시의 오디오 스피커 생산업체에 아주 잠깐 다녔다. 프레스 기계에서 찍혀나온 스피커 모양의 금속붙이들을 정리하는 게 일이었다. 수십 개를 간추려 작업장 한쪽에 옮겨 쌓고 돌아오면 기계가 토해낸 일감들이 또 수북이 공장바닥에 쌓였다. 몇시간 못가 손아귀와 팔뚝이 후들거렸다. 행여나 싶어 며칠간 머리를 감지 않고 가장 허름한 점퍼를 걸친 채 소사여객 버스를 타고 도착한 약대동에는 작은 공장들이 즐비했다. 사진도 붙이지 않은 이력서를 쓱 훑어본 관리사원은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하루 일당 3700원에서 점심값 600원을 떼면 3100원, 한 달 꼬박 일해도 야근을 하지 않으면 10만원이 채 안됐다. 대학가 하숙비가 12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점심시간. 식..

칼럼 2010.09.13